Q. 마케팅에서 카니발리제이션(cannibalization, 자기잠식)은 청신호 or 적신호일까요?
첫인상은 좋지 않습니다. 본래 ‘잠식’이란 ‘조금씩 침략당하여 먹혀 들어간다’라는 건데, 여기에 ‘자기’가 붙으면 ‘제 살을 깎는’ 현상이 되니까요.
실제 사례에 적용을 해보면 기업의 신제품이 기존 주력 제품의 매출을 떨어뜨리는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미 수익성 높은 제품이 매출을 책임지고 있는데, 되려 수익성이 낮은 제품이 이를 대체하니 기업 입장에서는 역효과 아니겠냐는 거죠. 그간 마케팅에서 카니발리제이션은 기피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고, 소비자의 니즈가 세분화되면서 카니발리제이션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 나타났습니다. 자기잠식이 도리어 혁신을 일으킨다는 것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코카콜라. 1982년 다이어트 코크, 2005년 코카콜라 제로를 출시하며 제로 탄산 음료 시장을 열었습니다. 당시 업계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컸습니다.
‘탄산 음료란 아릴만큼 달콤한 설탕을 근간으로 하거늘…’ 뭐 이런 기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요. 딸기맛도 메론맛도 아닌 ‘굳이 오리지널의 영역을 침범하는 똑같은 맛을 만들었다’라는, 카니발리제이션에 대한 화두였습니다.
코카콜라의 선구안은 과거 탄산음료 시장에 없던 세그먼트(segment)를 확장했습니다. 우려했던 기존 고객의 이탈보다는 새로운 고객의 유입이 생겨난 겁니다. 다이어트에 관심이 많은 이들은 물론, 당뇨병 등의 기저 질환으로 설탕 섭취에 부담을 느꼈던 이들까지 끌어안았습니다.
제로 탄산의 폭발적인 인기는 국내 시장을 살짝만 들춰봐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롯데칠성의 ‘칠성사이다 제로’는 지난해 국내 판매량 1억캔을 돌파했고, ‘펩시 제로 슈거’나 ‘탐스 제로’와 같은 새로운 라인의 반응도 뜨겁습니다.
“가전은 LG’”라는 카피는 허풍이 아닙니다. LG전자는 올해 1분기 역대 최대 매출액과 영업이익을 모두 경신했습니다. 언제나 꾸준히 인기 있는 탑-도그(top dog) 제품군만이 아니라 ‘기존을 위협하는’ 신제품이 있기에 가능한 성과였습니다.
저는 LG전자 제품이라 하면, TV나 데스크탑, 노트북과 같은 모니터 카테고리가 떠오릅니다. 깔끔한 디자인, 선명한 색감, 가볍고 튼튼한 기능성 때문만이 아니라 니치한(niche) 신제품이 많거든요.
지난해 출시된 이동형 무선 TV ‘스탠바이미’는 태블릿, 노트북, 데스크톱, TV의 경계에 있습니다. 다시 해석하면 기존 제품이 있으면 필요성이 없는데, 오히려 그 지점을 전복해 포지셔닝(positioning)을 했습니다. ‘태블릿처럼 손으로 들고 다닐 필요가 없고, 노트북보다 화면이 크며, 데스크톱이나 TV보다 이동이 쉬운’ 제품으로 말입니다.
비슷하지만 다른 예로는 캠핑족에게 각광받는 ‘룸앤 TV’가 있습니다. 1인 가구용 TV를 표방한 출시 즈음에는 말 그대로 카니발리제이션이 될 뻔했으나, 소비 트렌드를 읽으며 판매 역주행을 일으켰습니다. 무게가 4.5㎏에 불과해 휴대가 가능하고 전원만 연결하면 선명한 화면을 그대로 볼 수 있다는 특성을 활용해 ‘캠핑용 TV’로요.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시장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카니발리제이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큰 기회라고 생각한다. 우리 제품이 가진 시장을 우리가 잠식하지 못하면 다른 경쟁 업체가 가져가 버리기 때문이다.”
애플 CEO 팀 쿡의 말입니다. 애플이 에어팟의 수요를 빼앗을 수 있는 아이폰을, 맥북의 수요를 빼앗을 수도 있는 아이패드를 시장에 내놓지 않았다면? 지금의 애플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코카콜라, LG전자, 애플이 몸소 보여준 제 살 깎는 희생 또는 도전. 카니발리제이션, 달리 보면 혁신이 될 수 있습니다.